나의 지난 글들을 보셨다면 내가 시험관아기 4차까지 시술을 했고, 임신에 성공해서 막달까지 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관아기 졸업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졸업의 의미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난임센터를 떠나 산과로 가면서부터를 졸업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유산확률이 적은 12주쯔음부터를 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졸업은 출산을 뜻했고, 지금은 출산을 했기에 이렇게, 드디어, 편하게 졸업 이야기를 써본다.
나의 시험관 이야기, 시작과 끝
나에게는 오랜기간 만나온 남자친구가 있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무탈하게 만나왔는데, 만나 오면서 어느 20대 후반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이 사람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만들겠구나."
하지만 현실은 진흙탕이였고, 돈도 없고 미래도 없는 나에게는 힘든 사회생활만이 있었고 남자친구 또한 별반 다르지 않던 상황이었기에 언젠가 20대를 마무리하던 즈음 결혼을 포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다시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이 사람가 연애만 하겠구나. 내 인생에 결혼은 없겠어."
한동안은 결혼도 못해보고 죽어야 하는 내 신세가 처량했었는데 정말 마음에서 "포기"를 해 버리고 나니 행복해졌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내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저 감사했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만나서 웃고 떠들고, 맛있는 거 먹고 여행 다니는 게 현실적으로 맞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또 몇 년을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다 우리는 30대가 되었고, 어쩌다 상황이 조금 좋아져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을 포기했었다가 결혼을 하게 돼버렸으니 나에게는 현재의 "결혼"에만 집중되었고, 다음 단계로 올 "아기"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나는 아기가 생긴다는 게 두려웠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과연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헌신할 수 있을까 온갖 퀘스쳔에 명확한 답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기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오로지 내 남편이었다. 연애를 그렇게 길게 했음에도 결혼을 하고 같이 살면서 느끼는 점은 또 다르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 90프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혼생활을 하며 보이는 새로운 모습이 많았다. 아기를 가져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던 이유를 딱 "이것"때문이다라는 모먼트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서서히", "언제부턴가"라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이 이 사람을 닮은 아이가 우리에게 있으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엄청난 변화였다. 그전까지는 아기를 봐도 이쁘다는 생각도 없었고, 어디선가 아기울음소리가 들리면 심지어 싫었고 듣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그런 소리들도 너무 이쁘고 귀엽고 어느 아기를 봐도 한번 안아보고 싶을 정도로 호감으로 변했으니, 정말 사람들이 아기가 이뻐 보이면 아기 가질 때가 된 거라고 한 게 이런 이야기구나 싶었으니까.
하지만 아기를 갖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규칙적인 생리 사이클은 코로나에 걸리면서부터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고, 심지어는 생리를 한 달 건너뛰며 가임기간을 예측할 수도 없었는데 그렇게 반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늦은 나이게 결혼을 한 터라(내 기준에서) 노산도 걱정되고, 매달 며칠 안 되는 임신의 기회는 생각보다 잡기 어려웠다.
그렇게 난임센터를 가게 되었고, 시험관시술까지 하게 된 나의 사연.
임신하려고 회사까지 그만두게 될 줄 몰랐다. 회사생활이 잘 맞는 편은 아니었지만, 일을 하면서 꽤나 성취감도 느끼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좋았기에 임신하고서까지 다니다가 출산휴가를 가게 될 줄 알았는데 인생은 역시 내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시기에 회사를 그만둔 것은 잘한 일임이 틀림없다. 때 되면 생기겠지 하며 기다리다가 늙어버리는 나의 몸과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되었을 때 들이닥칠 후폭풍이 지금의 폭풍보다 더 크다는 것은 확실하니까.
임신 히스토리 정리
22년 2월 결혼
22년 8월 보건소 산전검사
22년 11월 일산차병원 난임센터 산전검사
23년 4월 일산차병원 난임센터 과배란
23년 7월 일산차병원 난임센터 시험관시술 시작
23년 12월 일산차병원 난임센터 시험관시술 성공
24년 1월 일산차병원 산과로 이동
24년 8월 일산차병원에서 출산
보건소에서 산전검사를 하면서부터 임신을 준비했으니 따지고 보면 1년 3개월 정도 걸렸다. 나는 긍정적인 편이 아니어서 그런지 시험관 시술을 하던 약 5개월간의 기억이 생각보다 끔찍하다. 오롯이 임신에만 집중되어 있는 생활을 하다 보니 집착을 하게 되고, 실패를 거듭할수록 안된다는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심했었는데 이는 시험관시술이 한 번에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이러다 안되는구나, 우리는 아이 없는 결혼생활을 해야 할 수도 있구나. 내가 포기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매년 공부한 게 아까워서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호르몬 약물 사용기간이 길어질수록 평생 찌지 않던 살이 찌기 시작하고(부은 건 줄 알았는데 살이었다는), 튼튼한 줄 알았던 몸이 조금씩 혹사되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딱 1년만 해보자는 생각으로 버텼던 것 같다. 사실상 1년이나 시험관시술을 실제로 해야 했다면 못 버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몸을 갈아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아기.. 그랬었던 것 같다.
약물 사용이 중단되고 진료를 산과에서 보던 즈음, 그동안 맞았던 주사들을(100개가 훌쩍 넘는다) 예쁘게 정렬해서 사진을 찍어두었다. 언젠가 시험관 졸업사진을 내 콘텐츠에 올릴 수 있겠지 생각하며.. 그리고 지금에서야 올리게 되는 사진.
난생처음 해보는 임신이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임신이었으니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함을 안고 있었는데 그 불안함은 출산 때까지 이어졌다. 내가 품은 이 아기가 나의 불안을 알아차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 말이다.
끝으로..
임신. 나는 조금 어렵고 힘들게 시작했다. 하지만 괜찮았다.(괜찮다고 생각했다) 나의 아기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만큼 힘들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너무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시험관 시술 기간을 잔잔히 돌이켜봐도 많이 힘들었고 많이 슬프다. 시간이 지나면 덤덤해질 줄 알았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건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시험관시술을 준비하는 예비부모들의 절실함이 실패라는 결과를 맞닥뜨렸을 때의 좌절감과 슬픔을 너무도 알고 있어서 부디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은 슬픔과 힘듦을 겪지 않고 아이를 만나기를 항상 바라고 있다.
그리고, 만약에라도 나와 같은 힘듦을 겪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충분히 힘들어하고, 충분히 아프더라도 견디라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의 힘듦의 강도보다 더 큰 강도의 행복이 아이와 함께 찾아올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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